역사는 한 국가가 생기고, 번성하고, 쇠퇴하는 것을 기록한 것이어서 역사를 버리면 그 민족은 국가에 대한 관념이 크지 않다는 신채호 선생의 신념을 담은 이 책은,
우리나라가 새로운 역사를 편찬해냄에 지지부진하여 역사 교과서를 살펴보니 가치가 있는 역사책이 없음을 한탄한 신채호 선생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해 대한 매일 신보에 연재한 것을 모아 발간한 것이다.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많은 학자들이 우리 선조들이 남겨주신 자료를 토대로 역사에 대한 공부와 고증을 거쳐 내 놓은 자료를 여러 매체로 접하고 있지만,
아직 역사를 접할 기회가 부족했던, 1908년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을 위해 작성된 고대사를 통해 미완의 작품이긴 하나 신채호 선생의 역사에 대한 사랑을 느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신채호 [申采浩]
(1880. 11. 7. ~ 1936. 2. 21.)
호는 일편단생(一片丹生)·단생(丹生) 혹은 단재(丹齋)다.
그는 22세부터 강사로 계몽운동을 하였으며, 26세 황성신문의 기자로 논설을 쓰기 시작했으나, 무기 정간되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에 일본의 삼대충노(三大忠奴), 금일 대한국민의 목적지, 한국자치제의 약사, 국가를 멸망케 하는 학부, 한일합병론자에게 고함, 이십세기 신국민, 독사신론(讀史新論), 수군 제일 위인 이순신전, 동국거걸최도통전(東國巨傑崔都統傳)등의 논설을 실어 정부에 대한 격려, 경계 및 국민에 대한 계몽운동을 계속 진행하였다.
그 밖에 역술서 이태리건국삼걸전(伊太利建國三傑傳)과 을지문덕전(乙支文德傳)을 국한문판으로 발행하기도 하였다.
그는 28세 무렵, 항일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 조직에 참여하였고 국채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에도 참여하여 논설을 통해 적극 지원하기도 하였고, 이후 광복회(光復會)를 조직하고 부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19년 북경에서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 단장이 되었다. 그 해 4월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임시의정원 의원이 되었다가 사임하였던 그는 행동 투쟁에 나섰다가, 1928년 대만에서 외국위체위조사건(外國爲替僞造事件)의 연루자로 체포되어 여순감옥(旅順監獄)으로 이감, 복역하던 중 뇌일혈로 순국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이순신전, 일지문덕전, 조선상고사, 낭객의 신년 만필, 조선혁명선언, 독사신론등이 있다.